전생 이야기
그대는 영조 21년, 한양 북촌의 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소. 가문은 노론 명문가였으나, 정치적 풍파를 피해 학문에 전념하던 집안이었소. 그대의 아버지는 사간원의 정언을 지냈고, 어머니는 글을 아는 정실 부인이었소. 세 살에 천자문을 떼었고, 일곱 살에 사서를 외웠소. 또래들이 골목에서 뛰놀 때, 그대는 사랑채 마루에 앉아 책을 펼쳤소. 외롭다 느낀 적도 있었으나, 책 속에서 만난 공자, 맹자, 주자가 그대의 친구였소. 그들의 가르침이 그대의 뼈대가 되었소. 열다섯에 향시에 합격했고, 스물에 진사시를 통과했소. 모두가 대과를 권했으나, 그대의 마음은 한양의 시끄러운 권력 다툼에 가 있지 않았소. 그대가 본 조선은 너무 어지러웠소. 당쟁은 끝이 없었고, 백성의 살림은 메말라 갔소. 글 한 줄로 이 시대를 어찌 구할 수 있을까 — 그것이 그대의 평생의 화두였소. 스물다섯, 그대는 한양을 떠나 고향 안동으로 내려갔소. 거기서 작은 서당을 열었고, 가난한 집의 자제들을 받아 가르쳤소. 학문은 양반만의 것이 아니라는 그대의 신념이었소. 사람들은 그대를 비웃었소. "양반가의 자제가 상놈의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손가락질이었소. 그러나 그대는 흔들리지 않았소. 그대의 서당에서 글을 깨친 한 농부의 아들이 훗날 진사가 되었을 때, 그대는 비로소 미소 지었소. 서른 즈음, 그대는 한 권의 책을 쓰기 시작했소. 성리학의 이기론을 그대 나름대로 풀어낸 책이었소. 십 년의 사색이 한 권에 담겼소. 그 책은 그대 생전에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그대 사후 백 년이 지나 한 학자가 그것을 발견했고, 그대의 이름이 비로소 후세에 전해졌소. 그대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소. 누군가는 그대가 학문에 미쳤다 했고, 누군가는 그대가 한 사람을 마음에 두었으나 신분 차이로 단념했다 수군거렸소. 진실은 그대만이 알았소. 다만 그대의 책상 한구석에는 늘 마른 매화 한 송이가 놓여 있었소. 마흔다섯의 어느 가을, 그대는 제자들 앞에서 마지막 강의를 했소. "학문은 끝이 없으니, 한평생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끝을 향해 가는 그 자체가 학문이다." 그것이 그대의 마지막 말이었소. 제자들은 그 말을 가슴에 새겼고, 평생 잊지 않았소. 그날 밤, 그대는 평소처럼 사랑채에서 책을 읽다가 등불을 끄고 잠들었소. 그리고 다시 깨어나지 않았소. 제자들이 발견했을 때, 그대의 손에는 펼쳐진 채로 『대학』이 있었소. 책의 마지막 장에는 그대의 작은 글씨로 한 줄이 쓰여 있었소. "오늘도 한 걸음." 그대의 죽음을 들은 임금이 사관에게 명하여 그대의 행적을 살피게 했소. 사관이 안동에 도착했을 때, 그대의 서당에는 이백여 명의 제자들이 모여 곡(哭)하고 있었소. 그들 중 셋이 후일 대제학이 되었고, 그들이 가르친 제자들이 또 한 시대의 학문을 이끌었소. 그대는 외로운 길을 걸었으나, 외롭지 않았소. 그대가 떠난 후에도 그대의 가르침은 한 줄기 강물처럼 흘렀소. 그대는 한 시대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시대를 넘어 흐르는 학문의 등불이었던 것이오. 그 등불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책상 위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을지 모르오.




